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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

소설 | 히가시노 게이고《11문자 살인사건》리뷰 (스포 有)

by 생각의조각 2022.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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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리디북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 | 일본 소설 | 미스터리/스릴러

 

《11문자 살인사건》소개

 

《11문자 살인사건》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1987년 발표한 장편소설로써, 그의 데뷔 후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 번역 출간되었다고 하네요.

 

이야기는 주인공의 애인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면서 시작됩니다. 그 죽음은 미심쩍고 평범하지 않았죠. 애인은 무참히 살해되어 바다에 버려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범인은 살인 후 11글자로 이루어진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깁니다.

 

무인도로부터 살의를 담아

 

무인도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요? 

 

주인공은 여성 추리소설가입니다. 추리소설가라는 직업 때문일까, 그녀는 애인의 죽음 이면에 숨겨진 사연이 심상찮음을 느끼고 마치 탐정처럼 애인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주인공의 담당 편집자 또한 이 사건에 흥미를 느끼고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줍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애인의 죽음이 예전에 일어난 요트 사고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몇 년 전 요트가 전복되면서 11명의 사람들이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이 죽고 맙니다. 애인은 나머지 10명의 생존자 중 한 명이었죠.

 

그런데 어쩐지 무인도에서의 죽음은 석연찮고, 이 일에 관련된 모든 생존자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주인공은 직감적으로 깨닫습니다. 그리고 잇따른 관계자들의 죽음. 아마도 살인 사건의 범인은 무인도에서 죽은 사망자의 소중한 사람, 즉 가족이나 애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대체 과거 그 무인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무인도에서 죽은 사람은 억울한 희생자였던 걸까요?

 

모두에게 최선이라면, 그것은 정당한 살인인가?

 

수많은 방해공작과 목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과거 무인도에서의 진상을 밝혀냅니다. 그리고 큰 혼란에 빠지게 되죠. 독자 또한 주인공의 경로를 따라가며, 그와 같은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선인이고, 가해자는 악인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곤 합니다. 아마 전자가 더 큰 것, 그러니까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는 이유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밝혀낸 과거의 진상은, 그녀의 예상과는 좀 달랐어요. 피해자는 선인이라기에는 비열했고, 악인이라기에는 나름 그만의 미덕(?)과 용기도 가지고 있었거든요.

 

즉 그는 선인과 악인, 둘 중 하나라고 단정 지어 말하기 애매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으면 다른 10명의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 때문에 그는 죽어야만 했던 거죠. 생존자들은 말합니다. 그는 죽어 마땅한 자였다고. 그러나 범인은 말합니다. 당신들의 그 말이 나를 분노하게 한다고. 그래서 복수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말이죠.

 

모두에게 최선이라면, 그것은 정당한 살인인가?

 

이는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묵직한 물음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독자마다 다를 겁니다. 각자가 우선시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죠. 무인도에서 일어난 비극도 우선하는 신념과 가치관의 차이, 이것이 원인입니다.

 

제 경우에는 무인도에서의 죽음이 범인만큼 안타깝지는 않습니다. 범인에게는 죽은 자가 소중하겠지만, 제게는 소중한 사람도 아닐뿐더러 확실히 그가 비열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죽어 마땅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동기가 불순하기는 했지만 그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용기를 발휘했고, 결과적으로 훌륭한 일을 한 건 사실이니까요.

 

한편으로는 이처럼 훌륭한 미덕을 가진 사람이 그 같은 비열함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게 납득되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무척 복잡하고 입체적인 존재임을 감안하면, 저런 종류의 사람도 있을 법합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범인이 분노한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인도 사건의 사망자와 생존자 모두, 꼭 집어 악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생존자들의 선택도 이해가 되거든요. 아마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저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범인이 복수의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요. 무인도에서의 죽음에 더 무거운(?)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비교적 가벼운(?) 책임을 가진 사람들이 먼저 살해당했거든요. 아니 기왕 죽일 거라면 잘못이 큰 쪽부터 죽이지, 왜 그나마 양심적인 사람들부터 죽인 건가 싶었어요. 역시 죽이기 만만해서겠지, 라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반전의 반전, 진정한 악당은 따로 있는 오픈 엔딩

 

앞서 이 소설은 악인과 선인의 경계가 애매하다고 했는데요, 사실 작가가 심어 놓은 반전의 반전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놀아나다보면 진정한 악당도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일명 손 안 대고 코 풀기의 명수입니다. 개인적으로 첫 등장부터 마지막까지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었어요.

 

그런 자가 마지막 승자가 되는 꼴을 보자니 속이 꼬이는 기분이 들더군요. 주인공의 앞날도 걱정스럽고요. 한편으로는 무척 현실적인 결말이라, 차라리 오픈 엔딩인 게 다행인 것 같기도 합니다. 정말 제대로 된 결말을 지었다면 주인공도 비극적인 마지막을 맞이했을지도 몰라요.

 

총평

 

주인공 1인칭 시점이라, 주인공과 함께 탐정이 된 듯 범인의 정체를 추적해 나가는 과정이 무척 즐거웠던 소설이었습니다. 범인의 정체를 추리하는 건 어설픈 독자에게도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그 상황에서 그렇게 절묘하게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생각해보면 용의자 범위가 대폭 좁혀지기 때문에 충분히 눈치챌 수 있어요.

 

그러나 단순히 '범인이 누구인가?', 뿐만 아니라 '무인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 일은 정당했는가', '나였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와 같은 묵직한 물음을 계속해서 던져 생각할 거리가 많습니다. 또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극적인 반전, 현실적인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드라마적인 요소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재미를 제공합니다.

 

보통 연이어 같은 작가의 글을 읽으면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는 느낌이라 질리게 되는데, 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여전히 너무나 재미있어요.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이토록 다양한 소재와 깊이 있는 주제로 연결하는 능력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또 다른 소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종류의 즐거움을 주려나,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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