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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

소설 | 히가시노 게이고《숙명 (宿命)》리뷰 (스포 有)

by 생각의조각 2022.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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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리디북스

숙명 (宿命)》 북 리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소미미디어│추리/미스터리/스릴러, 일본 소설

평타 이상의 재미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내게 항상 평타 이상의 재미를 준다. 지금까지 읽은 작품 중 이건 끔찍한 망작이다 싶을 정도로 지루한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가벼운 재미는 확실히 보장하되, 가슴에 묵직한 울림을 주거나 뇌리에 깊숙이 새겨지는 인상을 남긴 작품 또한 적다. 감정의 밀도가 낮아서 킬링 타임용으로 적합한, 마치 팝콘무비와 같은 팝콘 북이랄까. <숙명>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범인의 정체보다 궁금한 삼각관계의 결말

솔직히 이번 이야기에서는 범인의 정체나 범행 동기, 트릭보다 궁금했던 게 유사쿠-미사코-아키히코 삼각관계의 결말이었다. 소설 제목인 숙명 또한 세 사람의 숙명을 가리킨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주제와도 관련이 깊다.

 

유사쿠와 아키히코는 그야말로 극과 극, 상반된 매력을 갖고 대립하는 관계였는데 - 정확히는 유사쿠 혼자만의 섀도 복싱 같기도 - 개인적으로는 아키히코가 유사쿠보다 좋았다. 아마 주로 유사쿠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니, 유사쿠가 아키히코에 대해 가진 열등감, 질투심과 같은 부정적인 속마음이 지나치게 훤히 들여다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인간이라면 누구나 열등감과 질투심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고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그 감정을 수사에 개입시켜 편파적인 판단을 내리는 게 나로서는 영 못마땅했다. 반면 아키히코의 심리는 거의 마지막까지 꽁꽁 숨겨져 있기 때문에 신비감도 있거니와, 유사쿠보다 한결 폼 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셈이다.

 

한편으로는 유사쿠가 좀 안쓰럽기도 하다. 작가가 너무나 아키히코에게만 좋은 걸 몰빵 해줬다는 느낌이 강하다. 결국 모든 측면에서 아키히코의 승리이지 않았던가.

 

못내 찝찝한 결말

결말까지 읽고 나서 이상하게도 못내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충분히 납득할만한 범행 동기와 진범의 정체, 간단하지만 억지스럽지는 않은 범행 트릭이었으며 이야기의 짜임도 좋았는데 말이다.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보니, 소설 속에서의 문제 해결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숙명>은 결국 속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속죄 방법이 영 탐탁잖다.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그것을 공론화시켜야 제대로 반성할 수 있고, 추후 감시도 가능하다.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체실험과 같은 집단적 비극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숙명>에서는 결국 가해자가 죗값을 치르지 않고 명예도 깎이지 않는다. 즉 죄를 공론화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조용히 돈으로 보상하는 방식을 택한다. 아무리 마음속으로 사죄하고 돈으로 보상한들, 공론화하지 않은 이상 가해자는 크게 잃는 것이 없다.

 

게다가 공적인 차원에서의 예방 시스템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미래에 똑같은 일이 발생할 가능성마저 존재한다. 잘못을 조용히 덮기, 그것이 <숙명>에서의 문제 해결 방식이고 이는 일본 정부의 태도를 연상시켜 씁쓸하고 묘한 불쾌함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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